徐子曰: “仲尼亟稱於水,(서자왈 중니기칭어수) 曰: ‘水哉, 水哉!’(왈수재수재) 何取於水也?”(하취어수야)
徐子曰: “중니가(仲尼) 자주(亟) 물을 칭찬해서(稱於水), 말하길(曰): ‘물이여, 물이여(水哉, 水哉)!’했는데, 물에서(於水) 무엇을 취한 것인가요(何取也)?”
○ 亟, 數也. 水哉水哉, 歎美之辭.
○ 기는(亟), 자주다(數也). 수재수재는(水哉水哉), 탄미하는 말이다(歎美之辭).
孟子曰: “原泉混混, 不舍晝夜.(원천곤곤 불사주야)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영과이후진 방호사해 유본자여시 시지취이)
孟子曰: “근원이 있는 샘은(原泉) 세차게 흘러서(混混),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不舍晝夜). 구덩이를 채우고 나서(盈科而後) 나아가(進), 사해에 다다르니(放乎四海), 근본이 있는 것이(有本者) 이와 같고(如是), 이것을(是之) 취했을 뿐이다(取爾).
○ 原泉, 有原之水也. 混混, 湧出之貌. 不舍晝夜, 言常出不竭也. 盈, 滿也. 科, 坎也. 言其進以漸也. 放, 至也. 言水有原本, 不已而漸進以至於海; 如人有實行, 則亦不已而漸進以至於極也.
○ 원천은(原泉), 근원이 있는(有原之) 물이다(水也). 곤곤은(混混), 세차게 나오는 모습이다(湧出之貌). 불사주야는(不舍晝夜), 늘 나와서(常出) 마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言不竭也). 영은(盈), 가득함이다(滿也). 과는(科), 구덩이다(坎也). 그 나아감이 점진적인 것을 말했다(言其進以漸也). 방은(放), 다다름이다(至也). 물에(水) 근원이 있으면(有原本), 그치지 않고(不已而) 점차 나아가서(漸進以) 바다에 이르니(至於海); 사람에게(如人) 실제 행실이 있으면(有實行, 則) 또한(亦) 그치지 않고(不已而) 점차 나아가(漸進以) 궁극에 이른다는(至於極) 말이다(言也).
苟爲無本, 七八月之閒雨集, 溝澮皆盈;(구위무본 칠팔월지간우집 구회개영) 其涸也, 可立而待也.(기학야 가립이대야) 故聲聞過情, 君子恥之.”(고성문과정 군자치지)
진실로(苟) 근본이 없다면(爲無本), 7월과 8월 사이에(七八月之閒) 비가 모여(雨集), 도랑이(溝澮) 모두 가득 차더라도(皆盈); 그 마르는 것은(其涸也), 서서 기다릴 수 있다(可立而待也). 그러므로(故) 명성이(聲聞) 실제를 넘는 것을(過情), 군자가 부끄럽게 여긴다(君子恥之).”
* 溝澮(구회): 溝洫(구혁) 길가나 논밭 사이의 작은 도랑.
* 聲聞過情(성문과정): 聲聞은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라는 뜻인데, 이런 의미가 변해 명성이나 좋은 평판이라는 뜻을 갖게 됐다. 情은 뜻, 감정, 정신, 진심이라는 의미인데, 이로부터 사실 또는 진상이라는 의미가 생겼다.
○ 集, 聚也. 澮, 田閒水道也. 涸, 乾也. 如人無實行, 而暴得虛譽, 不能長久也. 聲聞, 名譽也. 情, 實也. 恥者, 恥其無實而將不繼也.
○ 집은(集), 모임이다(聚也). 회는(澮), 밭 사이의(田閒) 물길이다(水道也). 학은(涸), 마름이다(乾也). 사람에게(人) 실제 행실이 없는데도(無實行, 而) 갑자기(暴) 헛된 명예를 얻으면(得虛譽), 오래갈 수 없는 것과(不能長久) 같다(如也). 성문은(聲聞), 명예다(名譽也). 정은(情), 실질이다(實也). 치란(恥者), 실질이 없어서(其無實而) 장차 이어지지 않음을(將不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恥也).
林氏曰: “徐子之爲人, 必有躐等干譽之病, 故孟子以是答之.”
林氏曰: “서자의 사람됨이(徐子之爲人), 반드시(必) 뛰어넘고 명예를 구하는 병통이 있고(有躐等干譽之病), 그러므로(故) 맹자가(孟子) 이것으로(以是) 답했다(答之).”
○ 鄒氏曰: “孔子之稱水, 其旨微矣. 孟子獨取此者, 自徐子之所急者言之也. 孔子嘗以聞達告子張矣, 達者有本之謂也. 聞則無本之謂也. 然則學者其可以不務本乎?”
○ 鄒氏曰: “공자가(孔子之) 물을 칭찬한 것은(稱水), 그 뜻이(其旨) 미묘하다(微矣). 맹자가(孟子) 다만(獨) 이것을 취한 것은(取此者), 서자의 급한 것으로부터(自徐子之所急者) 말한 것이다(言之也). 공자가(孔子) 일찍이(嘗) 문달로(以聞達) 자장에게 일러준 것은(告子張矣), 달에는(達者) 근본이 있음을 말한 것이고有本之謂也), 문은(聞則) 근본이 없음을(無本之) 말한 것이다(謂也). 그렇다면(然則) 학자가(學者) 어찌(其) 근본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可以不務本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