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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 뒤안길/효경주소(孝經注疏)

[효경주소(孝經注疏) 어제서병주(御製序并注) (9-2)] 진한 시대를 거쳐 찌꺼기만 남았다 [전지자개조박지여(傳之者皆糟粕之餘)]

by मोक्ष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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況泯絕於秦, 得之者皆煨燼之末. (황민절어진 득지가개외신지말)

하물며(況) 진나라에서(於秦) 없어지고 끊어져(泯絕), 얻을 수 있는 것이(得之者) 모두(皆) 불타고 남은 것이다(煨燼之末). 

【疏】正義曰: '泯', 滅也. '秦'者, 隴西谷名也, 在雍州鳥鼠山之東北. 昔皐陶之子伯翳, 佐禹治水有功, 舜命作虞, 賜姓曰嬴. 其左孫非子爲周孝王養馬於汧·渭之間, 封爲附庸, 邑于秦谷. 及非子之曾孫秦仲, 周宣王又命爲大夫, 仲之孫襄公討西戎, 救周. 周室東遷, 以岐豐之地賜之, 始列爲諸侯. 
【疏】正義曰: '민(泯)'은, 없어졌다는 뜻이다(滅也). 진이란('秦'者), 농서의(隴西) 골짜기 이름이고(谷名也), 옹주(雍州) 조서산 동북에 있다(在鳥鼠山之東北). 옛날(昔) 고요의 아들(皐陶之子) 백예가(伯翳), 우가 치수하는 것을 도와(佐禹治水) 공이 있었고(有功), 순이 명하여(舜命) 우로 임명했고(作虞), 성을 주어(賜姓) 영이라 했다(曰嬴). 그(其) 후손인 비자가(左孫非子) 주 효왕을 위해(爲周孝王) 견수와 위수 사이에서(於汧·渭之間) 말을 길렀고(養馬), 봉해져서(封) 부용이 되어(爲附庸), 진곡에 도읍했다(邑于秦谷). 비자의 증손(非子之曾孫) 진중에 이르러(及秦仲), 주 선왕이(周宣王) 또 명하여(又命) 대부로 삼았고(爲大夫), 중의 손자 양공이(仲之孫襄公) 서융을 토벌하고(討西戎), 주나라를 구했다(救周). 주 왕실이(周室) 동으로 옮기고(東遷, 以) 기풍의 땅을(岐豐之地) 주었고(賜之), 비로소(始)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列爲諸侯).

 

春秋時稱秦伯, 至孝公子惠文君立, 是爲惠王. 及莊襄王爲秦質子於趙, 見呂不韋姬, 說而取之, 生始皇. 按秦昭王四十八年正月生於邯鄲, 及生, 名爲政, 姓趙氏. 年十三, 莊襄王死, 政代立爲秦王. 至二十六年, 平定天下, 號曰始皇帝. 

춘추시대에(春秋時) 진백이라 칭하고(稱秦伯), 효공의 아들(孝公子) 혜문군에 이르러(至惠文君) 왕위에 오르니(立), 이 사람이(是) 혜왕이 된다(爲惠王). 장양왕에 이르러(及莊襄王) 진나라를 위해(爲秦) 조나라에 인질이 되었는데(質子於趙), 여불위의 여자를 보고(見呂不韋姬), 좋아하여 취해서(說而取之), 시황을 낳았다(生始皇). 살피건대(按) 진나라 소왕 48년 정월에(秦昭王四十八年正月) 한단에서 태어났고(生於邯鄲), 태어났을 때(及生), 이름이 정이고(名爲政), 성은 조씨다(姓趙氏). 나이 13세에(年十三), 장양왕이 죽고(莊襄王死), 정이 자리를 대신하여(政代立) 진왕이 되었다(爲秦王). 26년에 이르러(至二十六年), 천하를 평정하고(平定天下), 호를(號) 시황제라고 했다(曰始皇帝).

 

三十四年置酒咸陽宮, 博士齊人淳于越進曰: "臣聞殷周之王千餘歲, 封子弟, 立功臣, 自爲枝輔. 今陛下有海內, 而子弟爲匹夫. 卒有田常六卿之臣, 無輔拂, 何以輔政哉!" 

34년에(三十四年) 함양궁에서 술자리를 벌였는데(置酒咸陽宮), 박사인(博士) 제나라 사람 순우월이 나아가 말하길(齊人淳于越進曰): "신이 듣기로(臣聞) 은나라와 주나라 왕이(殷周之王) 천여 년을 지나도록(千餘歲), 자제를 봉하고(封子弟), 공신을 <왕으로> 세워(立功臣), 자기의(自)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爲枝輔). 지금(今) 폐하께서(陛下) 사해를 가졌지만(有海內, 而) 자제들은(子弟) <권한 없는> 필부가 되었습니다(爲匹夫). 갑자기(卒) 전상이나(田常) 육경과 같은 신하가 나온다면(有六卿之臣), 보필할 사람이 없으니(無輔拂), 어떻게(何以) 정권을 보전할까요(輔政哉)!"라고 했다.

 

置酒(지추): 술자리를 벌임.

田常六卿: 국정을 전횡하는 신하의 대표적 사례로 든 것이다. 전상(田常)은 춘추시대 齊 簡公 때 정승으로서 민심을 얻은 후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세워 제나라에서 田氏의 專權 정치를 연 陳恒으로, 陳成子 또는 田成子라고도 한다. 육경(六卿)은 춘추시대 晉 昭公 때 권력을 행사하여 왕실을 약화시키고 頃公 때 왕실의 혼란을 평정한 다음 땅을 10개 縣으로 분할하여 자신들의 아들들을 縣大夫로 세웠던 韓氏‧趙氏‧魏氏‧范氏‧中行氏‧智氏를 말한다.

輔政: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는 ‘相救’로 되어 있고, '나라를 구한다'라는 뜻이다. 

 

丞相李斯曰: "五帝不相復, 三代不相襲. 非其相反, 時變異也. 今陛下創大業, 建萬世之功, 固非愚儒之所知. 臣請史官非秦記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敢有藏《詩》·《書》百家語者, 悉詣守尉雜燒之."

승상 이사가 말하길(丞相李斯曰): "오제는(五帝) <이전 제도를> 서로 반복하지 않았고(不相復), 삼대는(三代) <이전 제도를> 서로 따르지 않았습니다(不相襲). 이것은 서로 반대한 것이 아니라(非其相反), 시대가 변하여(時變) 달라서입니다(異也). 지금(今) 폐하께서(陛下) 대업을 일으켜서(創大業), 만세의 공을 세웠으니(建萬世之功), 진실로(固) 어리석은 유자들들이(愚儒之)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非所知). 신이(臣) 청컨대(請) 사관은(史官) 진나라의 기록이 아니라면(非秦記) 모두 태우고(皆燒之), 박사관이(博士官) 직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면(非所職), 천하에(天下) 감히(敢) 시, 서와 백가의 말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有藏《詩》·《書》百家語者), 모두(悉) 수위에게 가져오게 하여(詣守尉) 모아 태워야 합니다(雜燒之)."라고 했다. 

 

制曰: "可." 三十五年以爲諸生誹謗,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是經籍之道滅絕於秦. 《說文》云: "煨, 盆火也. 燼, 火餘也." 言遭秦焚阬之後, 典籍滅亡, 雖僅有存者, 皆火餘之微末耳. 若伏勝《尚書》·顏貞《孝經》之類是也. 

이에 말하길(制曰): "옳다(可)."라고 했다. 35살에는(三十五年) 학자들이 비방한다고 여겨(以爲諸生誹謗), 이에(乃) 금령을 범한 사람(犯禁者) 360여 명을(四百六十餘人) 골라(自除), 모두(皆) 함양에서 묻었다(阬之咸陽). 이에(是) 경적의 길이(經籍之道) 진나라에서(於秦) 끊어졌다(滅絕). 설문에 이르길(《說文》云): "외(煨)는, 동이에 있는 불이다(盆火也). 신은(燼), 불탄 나머지다(火餘也)."라고 했다. 진나라의(秦) 분서갱유를 만난(遭焚阬之) 뒤에(後), 경서가 사라지고(典籍滅亡), 비록(雖) 겨우(僅) 남은 것이(有存者), 모두(皆) 불탄 나머지의(火餘之) 아주 적은 것일 뿐이라는(微末耳) 말이다(言). 복승의 상서와(伏勝《尚書》) 안정의 효경(顏貞《孝經》)과 같은 것의(若之) 종류가 이것이다(類是也). 


濫觴於漢, 傳之者皆糟粕之餘.

濫觴於漢, 傳之者皆糟粕之餘.

 

* 濫觴(남상): 술잔에 겨우 넘칠 정도(程度)의 작은 물」이라는 뜻으로, a. 큰 강물도 그 근원(根源)은 술잔이 넘칠 정도(程度)의 작은 물에서 시작(始作)한다는 뜻과, b. 모든 사물(事物)이나 일의 시초(始初), 근원(根源)을 일컫는다.

 

【疏】正義曰:案《家語》: "孔子謂子路曰:夫江始於岷山, 其源可以濫觴, 及其至江津也, 不舫舟, 不避風雨, 不可以涉." 王肅曰: "觴所以盛酒者, 言其微也." 又《文選》郭景純《江賦》曰: "惟岷山之導江, 初發源乎濫觴." 臣翰注云: "濫謂泛濫, 小流貌. 觴, 酒醆也. 謂發源小如一盞." 

【疏】正義曰:가어를 살펴보면(案《家語》): 공자께서(孔子) 자로에게 일러 말하길(謂子路曰):"무릇(夫) 강이(江) 민산에서 시작하는데(始於岷山), 그 근원은(其源) 술잔에 넘칠 정도로 작은 물이지만(可以濫觴), 그것이 강나라에 이르면(及其至江津也), 배에 의지하지 않고(不舫舟), 비바람을 피하지 않으면(不避風雨), 건널 수 없다(不可以涉)."라고 했다. 왕숙이 말하길(王肅曰): "남은(觴) 술을 채운 것이니(所以盛酒者), 그 미약함을 말한다(言其微也)."라고 했다. 또(又) 문선에서(《文選》) 곽경순의 강부에서 말하길(郭景純《江賦》曰): "오직(惟) 민산이(岷山之) 강을 이끌어온 것이(導江), 처음에(初) 남상에서 발원했다(發源乎濫觴)."라고 했다. 신한의 주석에서 말하길(臣翰注云): "남은(濫) 물이 넘치는 것으로(泛濫), 작게 흐르는 모습을 말한다(謂小流貌). 상은(觴), 술잔이다(酒醆也). 발원한 것이(發源) 술 한 잔처럼 작다는 말이다(謂小如一盞)."

 

'漢'者, 巴蜀之間水名也. 二世元年, 諸侯叛秦, 沛人共立劉季以爲沛公. 二年八月入秦, 秦相趙高殺二世, 立二世兄子子嬰, 冬十月, 爲漢元年. 子嬰二年春正月, 項羽尊楚懷王爲義帝, 羽自立爲西楚霸王, 更立沛公爲漢王, 王巴·蜀·漢中四十一縣, 都南鄭. 五年, 破項羽, 斬之. 六年二月, 即皇帝位于汜水之陽, 遂取漢爲天下號, 若商·周然也. 

한이란('漢'者) , 파촉 사이를 흐는(巴蜀之間) 강 이름이다(水名也). 2세 원년에(二世元年), 제후들이(諸侯)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叛秦), 패 땅 사람들이(沛人) 함께 유계를 세워(共立劉季) 패공으로 삼았다(以爲沛公). 2년 8월(二年八月) 진나라에 들어가(入秦), 진나라 상(秦相) 조고가(趙高) 2세를 죽이고(殺二世), 2세의 형의 아들인 영을 세우고(立二世兄子子嬰), 겨울 10월이(冬十月), 한나라 원년이 된다(爲漢元年). 자영 2년(子嬰二年) 봄 정월에(春正月), 항우가(項羽) 초회왕을 높여(尊楚懷王) 의제로 삼고(爲義帝), 항우가(羽) 자신을 세워(自立) 서초패왕이 되고(爲西楚霸王), 다시(更) 패공을 세워(立沛公) 한왕으로 삼아(爲漢王), 파촉과 한중 41 현에서 왕노릇 하도록 하고(王巴·蜀·漢中四十一縣), 남정에 도읍했다(都南鄭). 5년(五年), 항우를 격파하고(破項羽), 죽였다(斬之). 6년 2월(六年二月), 범수 북쪽에서(于汜水之陽) 황제에 오르고(即皇帝位), 마침내(遂) 한을 취하여(取漢) 천하의 이름으로 삼으니(爲天下號), 상나라와 주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했다(若商·周然也).

 

漢興, 改秦之政, 大收篇藉. 言從始皇焚燒之后, 至漢氏尊學, 初除挾書之律, 有河間人顏貞出其父芝所藏, 凡一十八章, 以相傳授. 言其至少, 故云濫觴於漢也. 其后復盛, 則如江矣. 《釋名》云: "酒滓曰糟, 浮米曰粕." 旣以濫觴況其少, 因取糟粕比其微. 言醇粹旣喪, 但余此糟粕耳. 

한나라가 일어나서(漢興), 진나라의 정책을 바꾸고(改秦之政), 크게(大) 전적을 모았다(收篇藉). 言從시황제가(始皇) 책을 불태운 뒤로(焚燒之后), 한나라가(漢氏) 학문을 존중하여(至尊學), 처음으로(初) 협서율을 없애고(除挾書之律), 하간사람 안정이(有河間人顏貞) 그 아버지 안지가 소장하던 것을 내놓았는데(出其父芝所藏), 모두(凡) 18장이고(一十八章), 이것을(以) 서로 전해주었다(相傳授). 말이 너무 적고(言其至少), 그러므로(故) 한나라에서 너무 적었다고 말했다(云濫觴於漢也). 그 후(其后) 다시 풍성해져서(復盛, 則) 강과 같았다(如江矣). 석명에서 이르길(《釋名》云): "지게미가(酒滓) 조이고(曰糟), 떠다니는 쌀이(浮米) 박이다(曰粕)."라고 했다. 이미(旣以) 남상도(濫觴) 그것이 작은데(況其少), 인하여(因) 조박을 취해서(取糟粕) 그 작음을 비유했다(比其微). 순수한 술은(醇粹) 이미 없어지고(旣喪), 단지(但) 이런 조박만 남았을 뿐이라는(余此糟粕耳) 말이다(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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