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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 뒤안길/효경주소(孝經注疏)

[효경주소(孝經注疏) 어제서병주(御製序并注) (5)] 금문효경의 주석은 정현이 쓴 것이 아니다

by मोक्ष 2023.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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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분서령을 내렸을 때 하간(河間) 사람인 안지(顔芝)가 효경을 숨겨서 유실될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한(漢) 문제(文帝) 때에 안지(顔芝)의 아들 안정(顔貞)이 『효경』을 조정에 바쳤다고 한다. 이 효경은 18장으로 되어 있으며, 한대의 서체인 예서체(隸書體)로 쓰였기 때문에 '금문효경(今文孝經)'이라 부른다. 후한 말의 학자 정현(鄭玄)이 주석한 효경 1권이 있는데, 이것을 정주본(鄭注本)이라고 한다. 즉,  ‘정현주’라고 하면 금문효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주본(鄭注本)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지만 대체로 정현이 주석했다고 본다. 형병은 마치 자기의 주장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구부터 아래 넷째 단락의 ‘因著古文孝經稽疑一篇’까지 그리고 그 단락의 ‘以爲孔鄭二家雲泥致隔……於義爲允’은 모두 유자현(劉子玄(劉知幾))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12가지 증거를 들어 금문효경의 주석이 정현의 저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案今俗所行《孝經》, 題曰鄭氏注. 近古皆謂康成. 而晉魏之朝無有此說. 晉穆帝永和十一年, 及孝武太元元年, 再聚羣臣, 共論經義, 有荀昶者, 撰集《孝經》諸說, 始以鄭氏爲宗.

지금 민간에서(今俗) 효경으로 유통되는 것을 살펴보면(所行《孝經》), 제목이(題) 정현의 주라고 되어있다(曰鄭氏注). 가까운 과거에는(近古) 모두(皆) <정씨를> 강성(정현)이라고 했다(謂康成). 그러나(而) 진나라와 위나라 조정에서(晉魏之朝) 이런 설이 있지 않았다(無有此說). 진나라 목제(晉穆帝) 영화 11년과(永和十一年, 及) 효무제(孝武) 태원 원년에(太元元年), 다시(再) 여러 신하를 모아(聚羣臣), 함께(共) 이 경의 뜻을 논했는데(論經義), 순창이란 사람이 있어(有荀昶者), 효경의 여러 설을(《孝經》諸說) 모아 편집하면서(撰集), 비로소(始) 정씨의 설을(以鄭氏) 종주로 삼았다(爲宗).

 

晉末以來, 多有異論. 陸澄以爲非玄所注, 請不藏於祕省. 王儉不依其請, 遂得見傳. 至魏·齊則立學官, 著作律令. 蓋由虜俗無識, 故致斯訛舛. 然則經非鄭玄所注, 其驗有十二焉.

진말 이후로(晉末以來), 다른 논의가(異論) 많이 있었다(多有). 육징은(陸澄) 정현이 주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以爲非玄所注), 비서성에(於祕省) 보관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請不藏). 왕검이(王儉) 그 청에 의지하지 않아(不依其請), 마침내(遂) 전을 볼 수 있게 되었다(得見傳). 위나라와 제나라에 이르러(至魏·齊則) 관학에 세우고(立學官), 율령에 기록했다(著作律令). 대체로(蓋) 오랑캐의 풍속을 따라(由虜俗) 아는 것이 없었고(無識, 故) 이런 잘못에(斯訛舛) 이르게 되었다(致). 그렇다면(然則) 경이(經) 정현이 주한 것이 아님은(非鄭玄所注), 그 증거에(其驗) 12가지가 있다(有十二焉).

 

* 祕省(비성): 祕書省을 줄인 말이다. 비서성은 남북조시대 이후에 後漢 때 국가의 도서를 관장한 祕書監의 전통을 이어 설치한 관서다. 

 

據鄭自序云「遭黨錮之事逃難注禮, 至黨錮事解, 注《古文尚書》·《毛詩》·《論語》, 爲袁譚所逼, 來至元誠, 乃注《周易》」, 都無注《孝經》之文, 其驗一也. 

정현이(據鄭) 스스로 서에서 말하길(自序云) 「당고의 일을 당해(遭黨錮之事) 난리를 피하면서(逃難) 예를 주석했고(注禮), 당고의 일이 해결됨에 이르러(至黨錮事解), 고문상서, 모시, 논어를 주석했고(注《古文尚書》·《毛詩》·《論語》), 원담의 핍박을 받아(爲袁譚所逼), 원성에 이르러(來至元誠), 이에(乃) 주역을 주석했다(注《周易》)」라고 했는데, 도대체(都) 효경을 주석했다는 글이(注《孝經》之文) 없으니(無), 이것이(其) 첫 번째 증거다(驗一也).

 

黨錮之事(당고지사): 후한(後漢) 환제(桓帝, 132~167)와 영제(靈帝, 156~189) 때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농단하자 진번(陳蕃, ?~168), 이응(李膺, 110~169) 등의 학자와 태학생들이 환관들을 탄핵했다가 도리어 환관들의 반격을 받아 벼슬길이 막힌 일을 말한다. 환제와 영제 때 각각 한 번씩 일어났는데, 정현은 1차에 연루되었다. 

 

鄭君卒後, 其弟子追論師所注述及應對時人, 謂之《鄭志》, 其言鄭所注者, 唯有《毛詩》·三《禮》·《尚書》·《周易》, 都不言注《孝經》, 其驗二也.

정현이(鄭君) 죽은 뒤로(卒後), 그 제자들이(其弟子) 스승이 주석하고 저술한 것과(師所注述及) 당시 사람들에게 응대한 것을(應對時人) 의론하고 정리했는데(追論), 그것을 정지라고 하며(謂之《鄭志》), 거기에서(其) 정현이 주석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言鄭所注者), 오로지(唯) 모시, 삼례, 상서, 주역이 있고(有《毛詩》·三《禮》·《尚書》·《周易》), 효경을 주석한 것을(注《孝經》) 결코 말하지 않았으니(都不言), 이것이 두 번째 증거다(其驗二也).

 

又《鄭志目錄》記鄭之所注五經之外, 有《中候》·《大傳》·《七政論》·《乾象厤》·《六藝論》·《毛詩謂》·《荅臨碩難禮》·《駁許慎異議》·《釋廢疾》·《發墨守》·《箴膏盲》·《荅甄守然》等書, 寸紙片言, 莫不悉載, 若有《孝經》之注, 無容匿而不言, 其驗三也.

또(又) 정지목록은(《鄭志目錄》) 정현이 오경 이외의 것을(五經之外) 주석한 것을 기록했는데(鄭之所注), 중후, 태전, 칠정론, 건상력, 육예론, 모시위, 답임석난례, 박허신이의, 석발질, 발묵수, 잠고황, 답견수연 등의 책이 있고(有《中候》·《大傳》·《七政論》·《乾象厤》·《六藝論》·《毛詩謂》·《荅臨碩難禮》·《駁許慎異議》·《釋廢疾》·《發墨守》·《箴膏盲》·《荅甄守然》等書), 짧은 글과(寸紙) 한마디 말도(片言), 모두(悉) 실지 않은 것이 없으니(莫不載), 만약(若) 효경의 주가 있다면(有《孝經》之注), 숨겨서 말하지 않음을(匿而不言) 용납할리 없으니(無容), 이것이 그 세 번째 증거다(其驗三也).

 

* 寸紙(촌지), 寸楮(촌저): 1. 짧은便紙), 2. 자기(自己)의 편지(便紙)를 겸손(謙遜)하여 이르는 말.

 

鄭之弟子分授門徒, 各述所[]言, 更爲問荅, 編錄其語, 謂之《鄭記》, 唯載《詩》·《書》·《禮》·《易》·《論語》, 其言不及《孝經》, 其驗四也. 

정현의 제자가(鄭之弟子) <사방으로> 나누어져(分) 문도에게 전수하는데(授門徒), 각자(各) 스승의 말을 기록하고(述所[]言), 다시(更) 문답하고(爲問荅), 그 말을 엮어 기록한 것을(編錄其語), 정기라고 했는데(謂之《鄭記》), 오직(唯) 시, 서, 예, 역, 논어를 실었고(載《詩》·《書》·《禮》·《易》·《論語》), 그 말이(其言) 효경에는 미치지 않았으니(不及《孝經》), 이것이(其) 네 번째 증거다(驗四也).

 

趙商作《鄭玄碑銘》, 具載諸[]所注箋驗論, 亦不言注《孝經》. 晉中經薄《周易》·《尚書》·《中候》·《尚書大傳》·《毛詩》·《周禮》·《儀禮》·《禮記》·《論語》凡九書, 皆云鄭氏注, 名玄; 至於《孝經》, 則稱鄭氏解, 無「名玄」二字, 其驗五也.

조상이(趙商) 정현의 비명을 지었는데(作《鄭玄碑銘》), <정현이> 주, 전, 험, 논한 것을(所注箋驗論) 모두 일컬었는데(具載諸 [稱其]), 또한(亦) 효경을 주석했다고 말하지 않았다(不言注《孝經》). 진중경부에서(晉中經薄) 주역, 상서, 중후, 상서대전, 모시, 주례, 의례, 예기, 논어(《周易》·《尚書》·《中候》·《尚書大傳》·《毛詩》·《周禮》·《儀禮》·《禮記》·《論語》) 모두 9권의 책에(凡九書), 모두(皆) 정씨의 주를 말했는데(云鄭氏注), 이름은 현이고(名玄); 효경에 이르러서는(至於《孝經》, 則) 정씨가 해석했다고만 칭하고(稱鄭氏解), 명현이라는 두 글자가 없으니(無「名玄」二字), 이것이 다섯 번째 증거다(其驗五也).

 

《春秋緯·演孔圖》注云: 康成注三《禮》·《詩》·《易》·《尚書》·《論語》, 其《春秋經》則有評論. 宋均《詩譜序》云: 我先師北海鄭司農」, 則均是玄之傳業弟子, 師有注述, 無容不知, 而云《春秋》·《孝經》唯有評論, 非玄所注時明, 其驗六也.

춘추위 연공도 주에서 말하길(《春秋緯·演孔圖》注云): "강성이(康成) 삼례, 시, 서, 상서, 논어를 주석했고(注三《禮》·《詩》·《易》·《尚書》·《論語》), 그 춘추경에는(其《春秋經》則) 평론이 있다(有評論)."라고 했다. 송균 시보서에서 이르길(宋均《詩譜序》云): "나의(我) 스승은(先師) 북해 정사농이시고(北海鄭司農), 그렇다면(則) 송균은(均) 바로(是) 정현의(玄之) 수업을 받은 제자로(傳業弟子), 선생님에게(師) 주석과 저술이 있는 것을(有注述), 알지 못할 리 없는데(無容不知, 而) 춘추와 효경에(《春秋》·《孝經》) 오직 평론이 있다고 말했으니(唯有評論), 정현이 주석하지 않은 것이(非玄所注) 명백하고(時明), 이것이 여섯 번째 증거다(其驗六也).

 

又宋均《孝經緯注》引鄭《六藝論》敘《孝經》云「玄又爲之注」, 「司農論如是而均無聞焉. 有義無辭, 令予昏惑」. 擧鄭之語而云無聞, 其驗七也.

또(又) 송균이(宋均) 효경위주에서(《孝經緯注》) 정현의 육예론 서효경을 인용하여 말하길(引鄭《六藝論》敘《孝經》云) 「내가(玄) 또(又) 그것의 주를 지었다(爲之注)」라고 했으나, 「사농이 이와 같이 논했지만(司農論如是而) 균에게는 들은 것이 없다(均無聞焉). 뜻이 있더라도(有義) 말이 없었으니(無辭), 나로 하여금(令予) 혼란스럽게 한다(昏惑)」라고 했다. 정현의 말을 들어서(擧鄭之語而) 들은 것이 없다고 말했으니(云無聞), 이것이 일곱 번째 증거다(其驗七也).

 

宋均《春秋緯注》云「爲《春秋》·《孝經》略說」, 則非注之謂, 所言又爲之注者, 汎辭耳, 非事實. 其敘《春秋》亦云「玄又爲之注」, 寧可復責以實注《春秋》乎? 其驗八也.

송균이(宋均) 춘추위주에서 말하길(《春秋緯注》云) 「춘추와 효경의(《春秋》·《孝經》) 간략한 설명을 지었다(略說)」라고 한다면(, 則) 주를 말한 것이 아니며(非注之謂), 말한 것이(所言) 또(又) 주를 지었다는 것이라면(爲之注者), 가벼운 말일 뿐이니(汎辭耳), 사실이 아니다(非事實). 그(其) 춘추를 논설하면서도(敘《春秋》) 또한(亦) 내가 또 주석을 지었다고 말하는데(云「玄又爲之注」), 어찌(寧) 다시(復) 실제 춘추에 주를 달았다고(以實注《春秋》) 따질 수 있겠는가(可責乎)? 이것이 여덟 번째 증거다(其驗八也).

 

後漢史書存於代者, 有謝承·薛瑩·司馬彪·袁山松等, 其所注皆無《孝經》; 唯范氏書有《孝經》, 其驗九也.

후한의 사서가(後漢史書) 세상에 남은 것이(存於代者), 사승, 설영, 사마표, 원산송 등이 있는데(有謝承·薛瑩·司馬彪·袁山松等), 그 주한 것에(其所注) 모두(皆) 효경이 없고(無《孝經》); 오직(唯) 범씨의 책에(范氏書) 효경이 있으니(有《孝經》), 이것이 아홉 번째 증거다(其驗九也).

 

* 後漢史書存於代者: 代가 세상[世]의 뜻으로 쓰였다. ≪唐會要≫ 권 77 〈論經義〉에는 ‘世’로 되어 있다.

 

王肅《孝經傳》首有司馬宣王奉詔令諸儒注述《孝經》, 以肅說爲長. 若先有鄭注, 亦應言及, 而不言鄭, 其驗十也.

왕숙의 효경전(王肅《孝經傳》) 첫머리에(首) 사마선왕이(司馬宣王) 조칙을 받들어(奉詔) 여러 유자로 하여금(令諸儒) 효경의 주를 짓도록 한 일이 있는데(注述《孝經》), 왕숙의 설을(以肅說) 으뜸으로 여겼다(爲長). 만약(若) 앞서(先) 정현의 주석이 있었다면(有鄭注), 또한(亦) 마땅히(應) 언급이 있어야 하지만(言及, 而) 정현을 언급하지 않았으니(不言鄭), 이것이 열 번째 증거다(其驗十也).

 

王肅注書, 好發鄭短, 凡有小失, 皆在《聖證》, 若《孝經》此注亦出鄭氏, 被肅攻擊, 最應煩多, 而肅無言, 其驗十一也.

왕숙이(王肅) 책에 주석을 하면서(注書), 정현 주장의 단점을(鄭短) 드러내기 좋아해서(好發), 무릇(凡) 작은 실수가 있으면(有小失), 모두(皆) 성증에 남겼는데(在《聖證》), 만약(若) 효경의 이 주석도(《孝經》此注) 또한(亦) 정현에게서 나왔다면(出鄭氏), 왕숙에게(肅) 공격당함이(攻擊), 가장(最) 심했을 것인데도(應煩多, 而) 왕숙에게(肅) 말이 없으니(無言), 이것이 열한 번째 증거다(其驗十一也).

 

魏晉朝賢辯論時事, 鄭氏諸注無不撮引, 未有一言《孝經注》者, 其驗十二也.

위진 시대에(魏晉朝) 현자들이(賢) 당시의 일을 논변하면서(辯論時事), 정씨의 모든 주석에(鄭氏諸注) 모아 인용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無不撮引), 효경주를 한 번이라도 말한 것이(一言《孝經注》者) 있지 않으니(未有), 이것이 그 열한 번째 증거다(其驗十二也).

 

以此證驗, 易爲討覈, 而代之學者不覺其非, 乘後謬說, 競相推擧, 諸解不立學官, 此注獨行於世. 觀言語鄙陋, 義理乖謬, 固不可示彼後來, 傳諸不朽. 

이런 증거는(以此證驗), 쉽게(易) 조사할 수 있는데도(爲討覈, 而) 세상의 학자들이(代之學者) 그 잘못된 점을 깨닫지 못하고(不覺其非), 뒤의 그릇된 설에 올라타(乘後謬說), 다투어(競) 서로 학문을 추어주고(相推擧), 여러 해석(諸解) 학관에 세워지지 않았고(不立學官), 이 주석이(此注) 오직(獨) 세상에 유통되었다(行於世). 언어의 비루함을 보면(觀言語鄙陋), 의리가(義理) 어긋나고 잘못되어(乖謬), 진실로(固) 저 후학에게 보여주어(示彼後來), 영원히(不朽) 전해지게 해서는 안된다(不可傳諸)

 

* 討覈(토핵): 더듬어 살펴 사실()을 조사(調)함.

* 不朽(불후): 「썩지 아니함.」이라는 뜻으로, 영원()토록 변()하거나 없어지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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