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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五書) 읽기/논어집주(論語集注)

[논어집주(論語集注) 위정(爲政) 2-4] 배움의 과정과 목적 /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by मोक्ष 2024.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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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오십유오이지우학)

子曰: “나는(吾) 열 다섯 살에(十有五而) 배움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古者十五而入大學. 心之所之謂之志. 此所謂學, 卽大學之道也. 志乎此, 則念念在此而爲之不厭矣.

옛사람들은(古者) 열다섯 살에(十五而) 대학에 들어갔다(入大學). 마음이(心之) 가는 것을(所之) 지라고 한다(謂之志). 여기서(此) 이른바(所謂) 배움이란(學), 곧(卽) 대학의 도다(大學之道也). 이것에 뜻을 두면(志乎此, 則) 생각이 모두((念念) 여기에 있어서(在此而) 하는(배우는) 것을(爲之) 싫어하지 않는다(不厭矣).

三十而立,(삼십이립)

서른 살에(三十而) 섰고(立),


有以自立, 則守之固而無所事志矣.

스스로 설 수 있으면(有以自立, 則) 지키는 것이 굳고(守之固而) 뜻 두는 것을 일삼을 것이 없다(無所事志矣).

四十而不惑,(사십이불혹)

마흔 살에(四十而) 미혹하지 않았고(不惑),


於事物之所當然, 皆無所疑, 則知之明而無所事守矣.

사물의 당연한 것에(於事物之所當然), 모두(皆) 의심하는 것이 없으면(無所疑, 則) 앎이 분명하고(知之明而) 지키는 것을 일삼을 것이 없다(無所事守矣).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쉰 살에(五十而) 천명을 알았고(知天命),


天命, 卽天道之流行而賦於物者, 乃事物所以當然之故也. 知此則知極其精, 而不惑又不足言矣.

천명은(天命), 곧(卽) 천도가 흘러(天道之流行而) 만물에 부여된 것이고(賦於物者), 곧(乃) 사물이(事物) 마땅히 그렇게 되는 까닭이다(所以當然之故也). 이것을 알면(知此則) 앎이(知) 그 정밀함을 지극하게 하고(極其精, 而) 미혹하지 않는 것은(不惑) 또한(又) 말하기에도 부족하다(不足言矣).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

예순 살에(六十而) 귀가 순해졌고(耳順),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

소리가 들어와서(聲入) 마음이 통하면(心通), 거스르는 것이 없고(無所違逆), 아는 것이 지극해서(知之之至), 생각하지 않더라도(不思而) 얻는다(得也).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일흔 살에(七十而) 마음이 하려는 것을 따라도(從心所欲), 법도를 넘지 않았다(不踰矩).”라고 했다.

 

* 從心所欲(종심소욕): 所(소)란 '~하는 바, ~하는 것'이란 뜻으로 주어와 술어 사이에 쓰여 주술구조를 명사구로 만들어주는 특수대사다.


○ 從, 隨也. 矩, 法度之器, 所以爲方者也. 隨其心之所欲, 而自不過於法度, 安而行之, 不勉而中也.

○ 종은(從), 따름이다(隨也). 구는(矩), 법도의 기구이고(法度之器), 모난 것을 다루는 도구다(所以爲方者也). 그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더라도(隨其心之所欲, 而) 저절로(自) 법도를 넘지 않고(不過於法度), 편안하게 행하여(安而行之), 힘쓰지 않아도(不勉而) 맞는다(中也).

 

○ 程子曰: “孔子生而知之也, 言亦由學而至, 所以勉進後人也. 立, 能自立於斯道也. 不惑, 則無所疑矣. 知天命, 窮理盡性也. 耳順, 所聞皆通也. 從心所欲, 不踰矩, 則不勉而中矣.”

○ 程子曰: “공자는(孔子) 태어나면서(生而) 알았으나(知之也), 또한(亦) 배움으로 말미암아(由學而) 이르렀다고(至) 말한 것은(言), 후인을 나아가도록 격하려는 것이다(所以勉進後人也). 립은(立), 이 도에(於斯道) 스스로 설 수 있음이다(能自立也). 불혹은(不惑, 則) 의심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無所疑矣). 지천명은(知天命), 이치를 궁리해서(窮理) 본성을 다한(회복한) 것이다(盡性也). 이순은(耳順), 들은 것이(所聞) 모두 통함이다(皆通也). 종심소욕은 불유구는(從心所欲, 不踰矩, 則) 힘쓰지 않아도(不勉而) 맞음이다(中矣).”라고 했다.

 

又曰: “孔子自言其進德之序如此者, 聖人未必然, 但爲學者立法, 使之盈科而後進, 成章而後達耳.”

又曰: “공자가(孔子) 그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其進德之序) 이와 같은 것이라고(如此者) 스스로 말한 것은(自言), 성인이(聖人)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라(未必然), 다만(但) 배우는 사람을 위해(爲學者) 법을 세우고(立法), 그들로 하여금(使之) 과정을 채우고 나서(盈科而後) 나아가(進), 문장을 이루고 나서(成章而後) 통달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達耳).”라고 했다.

 

胡氏曰: “聖人之敎亦多術, 然其要使人不失其本心而已. 欲得此心者, 惟志乎聖人所示之學, 循其序而進焉. 至於一疵不存, 萬理明盡之後, 則其日用之間, 本心瑩然, 隨所意欲, 莫非至理. 蓋心卽體, 欲卽用, 體卽道, 用卽義, 聲爲律而身爲度矣.”

胡氏曰: “성인의 가르침이(聖人之敎) 또한(亦) 방법이 많지만(多術), 그러나(然) 그 요체는(其要) 사람들로 하여금(使人) 그 본심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不失其本心而已). 이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은(欲得此心者), 오직(惟) 성인이 보여준 배움에(乎聖人所示之學) 뜻을 두고(志), 그 순서를 따라(循其序而) 나아가야 한다(進焉). 한 가지 하자도 있지 않는 것에 이르러(至於一疵不存), 만 가지 이치가(萬理) 밝아짐이 다한 뒤에는(明盡之後, 則) 그(其) 일상 생활에서(日用之間), 본심이 환하고(本心瑩然), 마음이 하려는 것을 따라도(隨所意欲), 무엇도(莫) 지극한 이치 아닌 것이 없다(非至理). 대체로(蓋) 마음은 곧 몸이고(心卽體), 하려는 것은 곧 쓰임이니(欲卽用), 몸은 곧 도이고(體卽道), 쓰임은 곧 의라서(用卽義), 소리가(聲) 음이 되고(爲律而) 몸이 법도가 된다(身爲度矣).”

 

又曰: “聖人言此, 一以示學者當優游宿泳, 不可躐等而進; 二以示學者當日就月將, 不可半途而廢也.”

又曰: “성인이 이것을 말해서(聖人言此), 첫째는(一以) 학자가(學者) 마땅히(當) 넉넉하게 잠겨 헤엄치듯 하고(優游宿泳), 등급을 뛰어넘어 나아갈 수 없음을(不可躐等而進) 보였고(示); 둘째는(二以) 학자가(學者) 마땅히(當) 날로 나아가고(日就) 달로 나아가서(月將), 길을 반만 가다가 그만둘 수 없음을(不可半途而廢也) 보였다(示).”

 

愚謂聖人生知安行, 固無積累之漸, 然其心未嘗自謂已至此也. 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故因其近似以自名, 欲學者以是爲則而自勉, 非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也. 後凡言謙辭之屬, 意皆放此.

내가 생각건대(愚謂) 성인이(聖人) 태어나면서 알고(生知) 편안하게 행하므로(安行), 진실로(固) 쌓아나가는 적심이 없고(無積累之漸), 그러나(然) 그 마음이(其心) 일찍이(嘗) 스스로(自) 이미 여기에 이르렀다고 말한 적이 없다(謂已至此也). 이것은(是) 그 일상생활에서(其日用之間), 반드시(必) 홀로(獨) 그 나아감을 깨닫는 것이 있는데(覺其進而) 사람들은 아는 것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人不及知者). 그러므로(故) 그 가까운 것을 의지해서(因其近似以) 스스로 이름을 붙여(自名), 학자가(學者) 이것을 법칙으로 삼아(以是爲則而) 스스로 노력하게 하려는 것이고(自勉), 마음이(心) 실제로(實)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고(自聖而) 일부러(姑) 이러한 핑계를 만든 것이 아니다(爲是退託也). 뒤에(後) 무릇(凡) 겸사의 류를 말해서(言謙辭之屬), 뜻이(意) 모두(皆) 이것을 따랐다(放此).

 

* 退託(퇴탁): 꽁무니를 빼면서 핑계 댐. 退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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