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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맹의 뒤안길/효경주소(孝經注疏)

[효경주소(孝經注疏) 어제서병주(御製序并注) (9-7)] 위소와 왕숙은 선유의 영수가 된다

by मोक्ष 2023.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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韋昭·王肅, 先儒之領袖; 虞飜·劉邵, 抑又次焉. (위소왕숙 선유지영수 우번유소 억우차언)

위소와 왕숙은(韋昭·王肅), 선유의 영수가 되고(先儒之領袖); 우번과 유소는(虞飜·劉邵), 또(抑又) 다음이 된다(次焉). 

【疏】正義曰:自此至「有補將來」爲第四段, 序作注之意. 擧六家異同, 會五經旨趣. 敷暢經義, 望益將來也. 

【疏】正義曰:여기서부터(自此) 유보장래까지가(至「有補將來」) 네 번째 단락이 되고(爲第四段), 주를 지은 뜻을 서술했다(序作注之意). 육가의 같고 다른 점을 모두 들고(擧六家異同), 오경의 가리키는 바를 모았다(會五經旨趣). 경의 뜻을 부연하고(敷暢經義), 장래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望益將來也).

 

* 擧六家異同 會五經旨趣: 이 단락의 후반부에 있는 말을 끌어 쓴 것으로, 六家는 韋昭‧王肅‧虞飜‧劉邵‧劉炫‧陸澄이고, 五經은 ≪詩≫‧≪書≫‧≪易≫‧≪禮≫‧≪春秋≫이다.

 

《吳志》曰: "韋曜字弘嗣, 吳郡雲陽人, 本名昭, 避晉文帝諱, 改名曜. 事吳至中書僕射侍中, 領左國史, 封高陵亭侯." 《魏志》曰: "王肅字子雍, 王朗之子. 仕魏, 歷散騎黃門侍郞·散騎常侍兼太常." 《吳志》: "虞飜字仲翔, 會稽餘姚人. 漢末擧茂才, 曹公辟不就, 仕吳, 以儒學聞. 爲《老子》·《論語》·《國語》訓注, 傳於世." 《魏志》: "劉紹字孔才, 廣平邯鄲人. 仕魏, 歷散騎常侍, 賜爵關內侯, 著《人物志》百篇." 此指言韋·王所學, 在先儒之中, 如衣之有領袖也, 虞·劉二家亞次之. 抑, 語辭也. 

오지에서 말하길(《吳志》曰): "위요는(韋曜) 자가 홍사이고(字弘嗣), 오군 운양 사람이며(吳郡雲陽人), 본명은 소로(本名昭), 진나라 문제 이름의 위를 피하여(避晉文帝諱), 이름을 요로 고쳤다(改名曜). 오나라를 섬겨(事吳) 중서복사시중과(中書僕射侍中), 영좌국사에 이르렀고(領左國史), 고릉정후에 봉해졌다(封高陵亭侯)."라고 했다. 위지에 이르길(《魏志》曰): "왕숙은(王肅) 자가 자옹이고(字子雍), 왕랑의 아들이다(王朗之子). 위나라에서 벼슬하면서(仕魏), 산기황문시랑과 산기상시겸태상을 역임했다(歷散騎黃門侍郞·散騎常侍兼太常)."라고 했다. 오지에서는(《吳志》): "우번이(虞飜) 자가 중이고(字仲翔), 회계 여요 사람이라고 했다(會稽餘姚人). 한나라 말(漢末) 무재에 천거되어(擧茂才), 조공이 <불렀으나> 피하고(曹公辟) 나아가지 않고(不就), 오나라에서 벼슬하며(仕吳), 유학으로(以儒學) 명성이 있었다(聞). 노자, 논어, 국어의 훈주를 했고(爲《老子》·《論語》·《國語》訓注), 세상에 전해졌다(傳於世)."라고 했다. 위지에(《魏志》): "유소의 자는(劉紹字) 공재이고(孔才), 광평 한단 사람이다(廣平邯鄲人). 위나라에서 벼슬하고(仕魏), 산시상시를 역임하고(歷散騎常侍), 관내후의 작위를 받아으며(賜爵關內侯), 인물지 100 편을 지었다(著《人物志》百篇)."라고 했다. 이것은(此) 위소와 왕숙의 배움은(韋·王所學, 선유들 가운데 있어(在先儒之中), 옷에 우두머리가 있는 것과 같고(如衣之有領袖也), 우번과 유소 2가는(虞·劉二家) 그 다음이 됨을(亞次之) 가리켜 말한다(指言). 억(抑)은, 어조사다(語辭也). 

 

劉炫明安國之本, 陸澄譏康成之注. 

유현은(劉炫) 공안국을 밝혔고(明安國之本), 육징은(陸澄) 강성의 주를 비판했다(譏康成之注). 

【疏】正義曰: 《隋書》云: "劉炫字光伯, 河間景城人. 炫左畫方, 右畫圓, 口誦目數, 耳聽五事, 並擧無所遺失. 仕後周, 直門下省, 竟不得官. 縣司責其賦役, 炫自陳於內史, 乞送吏部. 吏部尙書韋世康問其所能, 炫自爲狀曰: '《周禮》·《禮記》·《毛詩》·《尙書》·《公羊》·《左傳》·《孝經》·《論語》, 孔·鄭·王·何·服·杜等注, 凡三十家, 雖義有精麤, 並堪講授. 《周易》·《儀禮》·《穀梁》, 用功頗少; 子史文集, 嘉言美事, 咸誦於心; 天文律歷, 窮覈微妙; 公私文翰, 未嘗擧手.' 吏部竟不詳試, 除殿內將軍. 仕隋, 歷太學博士, 罷歸河間, 賊中餓死, 謚宣德先生. 初, 炫旣得王邵所送古文孔安國注本, 遂著《古文稽疑》以明之." 蕭子顯《齊書》曰: "陸澄字彥淵, 吳郡吳人也. 少學博覽, 無不知. 起家仕宋, 至齊, 歷國子祭酒·光祿大夫. 初, 澄以晉荀昶所學爲非鄭玄所注, 請文藏秘書. 王儉違其議."

【疏】正義曰: 수서에 이르길(《隋書》云): "유현은(劉炫) 자가 광백이고(字光伯), 하간 경성사람이다(河間景城人). 유현은(炫) 왼손으로(左) 네모를 그리고(畫方), 오른손으로 원을 그리고(右畫圓), 입으로 외고(口誦) 눈으로 세고(目數), 귀로 들으로(耳聽) 다섯 가지 일을(五事), 함께 하면서도(並擧)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無所遺失). 후주에서 벼슬해서(仕後周), 문하성에 숙직하며(直門下省), 끝내(竟) 벼슬하지 않았다(不得官). 현의 관리가(縣司) 그에게 부역의 책임을 묻자(責其賦役), 유현이(炫) 내사에 스스로 <자기 사정을> 말하고(自陳於內史), 이부에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乞送吏部). 이부상서(吏部尙書) 위세강이(韋世康) 그가 잘하는 것을 묻자(問其所能), 유현이(炫) 스스로 글을 올려 말하길(自爲狀曰): '주역, 예기, 모시, 상서, 공양, 좌전, 효경, 논어의(《周禮》·《禮記》·《毛詩》·《尙書》·《公羊》·《左傳》·《孝經》·《論語》), 공주, 정주, 왕주, 하주, 복주, 두주 등(孔·鄭·王·何·服·杜等注), 모두 30 여가가(凡三十家), 비록(雖) 뜻에(義) 정교함과 거침이 있지만(有精麤), 모두(並) 강론하고 수업할 수 있습니다(堪講授). 주역, 의례, 예기는(《周易》·《儀禮》·《穀梁》), 들인 공이(用功) 다소 적지만(頗少); 자사문집의(子史文集), 아름다운 말과(嘉言) 좋은 이야기는(美事), 모두(咸) 마음에 통하고(誦於心); 천문율력은(天文律歷), 미묘한 것을 조사하고 밝혔고(窮覈微妙); 공사 문건은(公私文翰), 일찍이 직접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未嘗擧手).'라고 했다. 이부가(吏部) 끝내(竟) 자세히 시험하지 않고(不詳試), 전내장군에 임명했다(除殿內將軍). 수나라에서 벼슬하여(仕隋), 태학박사를 역임하고(歷太學博士), 그만두고(罷) 하간으로 돌아가(歸河間), <반란에 가담해> 도적떼 사이에서 굶어 죽으니(賊中餓死), 시호가(謚) 의덕선생이다(宣德先生). 이전에(初), 유현이(炫) 왕소가 고문 공안국주를 보낸 것을 얻고서(旣得王邵所送古文孔安國注本), 고문계의를 지어(遂著《古文稽疑》以) <뜻을> 밝혔다(明之)."라고 했다. 소자현의(蕭子顯) 제서에서 말하길(《齊書》曰): "육징은(陸澄) 자가 언연이고(字彥淵), 오군 오나라 사람이다(吳郡吳人也). 어려서(少) 배움이(學) 넓고(博覽),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無不知). 집에서 일어나(起家) 송에서 벼슬하고(仕宋), 제나라에 이르러(至齊), 국자제주와 광록대부를 역임했다(歷國子祭酒·光祿大夫). 처음에(初), 육징은(澄) 진나라 순창이 배운 것은(以晉荀昶所學) 정현의 주가 아니라고 말하고(爲非鄭玄所注), 비서성에 보관하지 말기를 청했다(請文[不]藏秘書). 왕검이(王儉) 그 의논을 어겼다(듣지 않았다)(違其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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