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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五書) 읽기/중용장구(中庸章句)

[중용장구(中庸章句)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 1/3] 중용은 누가 왜 지었는가? / 진실로 그 중을 잡아라 / 윤집궐중(允執厥中)

by मोक्ष 202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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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예기』에 포함된 한 편이었지만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한나라 이후에는 주해서가 나왔으며 33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송나라 정이(程頤)에 이르러 37장이 되었다가 주희가 다시 33장으로 가다듬어 독립된 경전으로 분리시켰다.

『중용』의 작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종래에는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백어(伯魚)가 급(伋)을 낳으니 그가 자사(子思)였다.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을 지었다”라는 대목이 있어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청대에 고증학이 대두되면서 자사의 저작이라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아직까지 유력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中庸』, 何爲而作也?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중용아위이작야 자사자우도학지실기전이작야)

중용은(『中庸』), 무엇을 위해(何爲而) 지었는가(作也)? 자사자가(子思子) 도학이 그 전승을 잃을까(道學之失其傳) 걱정해서(而) 지었다(作也).

蓋自上古聖神, 繼天立極, 而道統之傳有自來矣. 其見於經, 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 堯之一言, 至矣盡矣, 而舜復益之以三言者, 則所以明夫堯之一言, 必如是而後可庶幾也. 

대체로(蓋) 상고시대의 성인으로부터(自上古聖神), 하늘의 <뜻>을 이어(繼天) 표준을 세우고(立極, 而) 도통을 전한 것이(道統之傳) 예로부터 지금까지 있어왔다(有自來矣). 그것이(其) 경에 나타난 것은(見於經, 則) '윤집궐중'이고(‘允執厥中’者), 요임금이(堯之) 순임금에게 전수한 것이다(所以授舜也).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은(‘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순임금이(舜之) 우임금에게 전한 것이다(所以授禹也). 요임금의(堯之) 한마디 말이(一言), 지극하고(至矣) 다 밝혔지만(盡矣, 而) 순임금이(舜) 다시(復) 세 마디 말을(以三言) 거기에 더한 것은(益之者, 則) 저 요임금의 한마디 말을(夫堯之一言) 밝힌 것이니(所以明), 반드시(必) 이와 같고 나서야(如是而後) 거의 할 수 있기 때문이다(可庶幾也).

 

* 聖神:《孟子》<盡心 下> 25장에 "大人이면서 化함을 聖人이라 하고, 성스러워 알 수 없는 것을 神人이라 한다.[而化之之謂聖聖而不可知之之謂神]"라고 했다. 주희는 《孟子集註》에서 "성스러워 알 수 없다는 것은 聖人이 지극히 오묘하여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음을 이르니, 성인 위에 또 한 등급의 神人이 있는 것이 아니다.(聖不可知 謂聖之至妙 人所不能測 非聖人之上 又有一 等神人也)"라는 程子의 설을 인용했다.

* 自來(자래), 自古以來(자고이래): 옛날부터 지금까지 


蓋嘗論之,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 

대체로(蓋) 시험 삼아(嘗) 한번 언급해 보면(論之), 마음의(心之) 허령지각은(虛靈知覺), 하나일 뿐이다(一而已矣). 그러나(而) 인심과 도심이 다름이 있다고(有人心道心之異) 여긴 것은(以爲者, 則) 그 어떤 것은(其或)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고(生於形氣之私), 어떤 것은(或) 성명의 바름에서 생기기 때문에(原於性命之正, 而) 지각하는 것이(所以爲知覺者) 같지 않기 때문이다(不同). 이 때문에(是以) 어떤 것은 위태롭고 불안하며(或危殆而不安), 어떤 것은 미묘하고 보기 어렵다(或微妙而難見耳). 

 

* 蓋嘗論之: 嘗은 嘗의 뜻으로, '한번~를 해보자'는 말이다. 앞에 나온 내용을 다시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다뤄보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 虛靈知覺: 虛靈은 인간의 精神, 思惟 능력과 마음의 활동 특성에 대해 묘사한 말이다. 虛는 형상과 실체가 없음을 가리키고, 靈은 정신의 기능과 작용이 신령스럽고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음을 가리킨다. 知覺은 일종의 認知形式으로 마음이 갖추고 있는 기능이다. 知는 사물을 식별하고 사물의 표면현상에 대해 認識하며, 覺은 知를 기반으로 마음속에 깨닫고 사물 전체에 대해 인식한다.

* 形氣之私는 形氣, 곧 물리적 형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人欲에서 나온 私心이라는 말이고, 性命之正은 性命, 곧 天理에서 나온 公心이라는 말이다.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心. 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그러나(然) 사람이라면(人) 누구도(莫) 이 형체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고(不有是形), 그러므로(故) 비록(雖) 상지라도(上智) 인심이 없을 수 없고(不能無人心); 또한(亦) 누구도(莫) 이 성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고(不有是性), 그러므로(故) 비록(雖) 하우라도(下愚) 도심이 없을 수 없다(不能無道心). 둘이(二者) 마음에 뒤섞여(雜於方寸之間而) 다스려지지 않는다면(不知所以治之, 則) 위험한 것은(危者) 더욱 위험해지고(愈危), 미묘한 것은(微者) 더욱 미묘해져서(愈微, 而) 천리의 공심이(天理之公), 마침내(卒) 저 인욕의 사사로움을(夫人欲之私) 감당할 수 없다(無以勝矣). 

 

精, 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 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從事於斯, 無少間斷,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정은(精, 則) 저 둘의 사이를 살펴(察夫二者之間而) 뒤섞이지 않도록 하고(不雜也); 일은(一, 則) 그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守其本心之正而) 떠나지 않도록 한다(不離也). 이것에 종사하여(從事於斯), 잠깐의 쉼이나 끊어짐이 없어(無少間斷), 반드시(必) 도심으로 하여금(使道心) 늘(常) 한 몸의 주인이 되도록 하고(爲一身之主, 而) 인심으로 하여금(人心) 늘(每) 명령을 듣도록 하면(聽命焉, 則) 위태로운 것이 편안해지고(危者安), 은미한 것이 드러나서(微者著, 而) 동정과 언행이(動靜云爲), 저절로(自) 지나치거나 모자라는(過不及之) 잘못이 없을 것이다(無差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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