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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五書) 읽기/논어집주(論語集注)

[논어집주(論語集注) 서설(序說)]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읽고 나서도 이런 사람이라면 논어를 읽은 것이 아니다

by मोक्ष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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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世家曰: “孔子, 名丘, 字仲尼. 其先, 宋人. 父, 叔梁紇; 母, 顔氏. 以魯襄公二十二年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戱,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爲委吏, 料量平; 爲司職吏, 畜蕃息.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而弟子益進.

사기세가에 이르길(史記世家曰): “공자는(孔子), 이름이 구이고(名丘), 자는 중니다(字仲尼). 그의 선조는(其先), 송나라 사람이다(宋人). 아버지는(父), 숙량흘이고(叔梁紇); 어머니는(母), 안씨다(顔氏). 노나라 양공 22년(以魯襄公二十二年) 경술년(기원전 551년)(庚戌之歲), 11월 경자일에(十一月庚子), 노나라 창평 추읍에서(於魯昌平鄕陬邑) 공자를 낳았다(生孔子). 아이가 되어(爲兒) 놀 때(嬉戱), 늘(常) 제기를 늘어놓고(陳俎豆), 예의, 바른 차림새를 흉내 냈다(設禮容). 커서(長) 위리가 되었을 때는(爲委吏), 셈하는 것이 공평했고(料量平); 사직리가 되어서는(爲司職吏), 가축을(畜) 많이 번식했다(蕃息). 주나라에 가서(適周), 노자에게 예를 묻고(問禮於老子), 돌아와서는(旣反而) 제자가(弟子) 더욱 늘었다(益進).

 

* 禮容(예용): 예의(禮儀) 바른 차림새나 태도(態度).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公欲封以尼谿之田, 晏嬰不可, 公惑之. 孔子遂行, 反乎魯.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强僭, 其臣陽虎作亂傳政. 故孔子不仕, 而退修詩書禮樂, 弟子彌衆.

소공 25년  갑신년(기원전 517년)에(昭公二十五年甲申), 공자 나이 35세가 되어(孔子年三十五, 而) 소공은 제나라로 망명하고(昭公奔齊),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魯亂). 이에(於是) 제나라에 가서(適齊),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爲高昭子家臣, 以) 경공에게 통했다(通乎景公). 경공이(公) 니계의 전지로(以尼谿之田) 봉하려고 했는데(欲封), 안영이(晏嬰) 찬성하지 않자(不可), 경공이 그것에 미혹됐다(公惑之). 공자가(孔子) 마침내 떠나서(遂行), 노나라에 돌아왔다(反乎魯). 정공 원년(定公元年) 임진년(기원전 509년)에(壬辰), 공자 나이(孔子年) 43세가 되어(四十三, 而) 계씨가 강성하고 주제넘게 굴었으며(季氏强僭), 그 가신(其臣) 양호가(陽虎) 난을 일으켜(作亂) 정권을 마음대로 했다(傳政). 그러므로(故) 공자가 벼슬하지 않고(孔子不仕, 而) 물러나(退) 시서예약을 정리하고(修詩書禮樂), 제자가(弟子) 더욱 많아졌다(彌衆).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狃, 以費畔季氏, 召孔子, 欲往而卒不行.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十年辛丑, 相定公, 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十二年癸卯, 使仲由爲季氏宰, 墮三都, 收其甲兵. 孟氏不肯墮成, 圍之不克.

정공 9년 경자년(기원전 501년)에(九年庚子), 공자 나이(孔子年) 51세가 되었다(五十一). 공산불뉴가(公山不狃), 비읍으로(以費) 계씨에게 배반하고(畔季氏), 공자를 불러(召孔子), 가려고 했지만(欲往而) 끝내 가지 않았다(卒不行). 정공이(定公) 공자를(以孔子) 중도재로 삼았다(爲中都宰). 일 년 만에(一年), 사방이 그를 본받았다(四方則之). 마침내(遂) 사공이 되고(爲司空), 또(又) 대사구가 되었다(爲大司寇). 10년 신축년에(十年辛丑), 정공을 보좌하고(相定公), 협곡에서(于夾谷) 제나라와 회맹하고(會齊侯), 제나라가(齊人) 침략한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歸魯侵地). 12년 계묘년에(十二年癸卯), 중유로 하여금(使仲由) 계시의 재가 되도록 하고(爲季氏宰), 삼도를 헐어(墮三都), 그 갑병을 거두었다(收其甲兵). 맹씨가(孟氏) 성을 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不肯墮成), 그를 포위했으나(圍之) 이기지 못했다(不克).

 

十四年乙巳, 孔子年五十六. 攝行相事, 誅少正卯, 與聞國政. 三月, 魯國大治. 齊人歸女樂以沮之, 季桓子受之, 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行.

14년 을사년에(十四年乙巳), 공자 나이(孔子年) 56세였다(五十六). 재상의 일을 대행하여(攝行相事), 소정묘를 주살하고(誅少正卯), 국정을 함께 들었다(與聞國政). 3개월 만에(三月), 노나라가(魯國) 크게 다스려졌다(大治). 제나라가(齊人) 여자와 악사를 보내(歸女樂以) 이를 저지하니(沮之), 계환자가 그것을 받고(季桓子受之), 교제를 지내고(郊) 또(又) 제사 지낸 고기를(膰俎) 대부에게(於大夫) 보내지 않으니(不致), 공자가 길을 떠났다(孔子行).

 

適衛, 主於子路妻兄顔濁鄒家. 適陳, 過匡, 匡人以爲陽虎而拘之. 旣解還衛, 主蘧伯玉家, 見南子. 去適宋, 司馬桓魋欲殺之. 又去適陳, 主司城貞子家, 居三歲而反于衛, 靈公不能用. 晉趙氏家臣佛肹, 以中牟畔, 召孔子. 孔子欲往, 亦不果. 將西見趙簡子, 至河而反. 又主蘧伯玉家, 靈公問陳, 不對而行, 復如陳.

위나라에 가서(適衛), 자로의 처형(子路妻兄) 안탁주의 집에 머물렀다(主於顔濁鄒家). 진나라에 가서(適陳), 굉 땅을 지나는데(過匡), 굉 사람들이(匡人) 양호로 생각하여(以爲陽虎而) 잡아 두었다(拘之). 풀려나고서(旣解) 위나라로 돌아와(還衛), 거백옥의 집에 머물면서(主蘧伯玉家), 남자를 만났다(見南子). 떠나서(去) 송나라에 갔는데(適宋), 사마환퇴가(司馬桓魋) 죽이려 했다(欲殺之). 또 떠나서(又去) 진나라에 가서(適陳), 사성정자의 집에 머물렀고(主司城貞子家), 3년을 머물다(居三歲而) 위나라에 돌아왔는데(反于衛), 영공이(靈公) 등용할 수 없었다(不能用). 진나라(晉) 조씨의 가신(趙氏家臣) 필힐이(佛肹), 중보로 배반하고(以中牟畔), 공자를 불렀다(召孔子). 공자가 가려고 했지만(孔子欲往), 또한(亦) 가지 않았다(不果). 장차(將) 서쪽으로 가서(西) 조간자를 만나고(見趙簡子), 하수에 이르러(至河而) 돌아왔다(反). 또(又) 거백옥의 집에 머물다가(主蘧伯玉家), 영공이(靈公) 진법을 묻자(問陳), 대답하지 않고(不對而) 떠나서(行), 다시(復) 진나라에 갔다(如陳).

 

季桓子卒, 遺言康子, 必召孔子. 其臣止之, 康子乃昭冉求. 孔子如蔡及葉. 楚昭王, 將以書社地, 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又反乎衛, 時靈公已卒. 衛君輒, 欲得孔子爲政. 而冉求爲季氏將, 與齊戰有功,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年六十八矣.

계환자가 죽으면서(季桓子卒), 유언으로(遺言) 강자에게 이르길(謂康子), 반드시(必) 공자를 불러라(召孔子)라고 했다. 그 신하(其臣) 반대하자(止之), 계강자가(康子) 이에(乃) 염구를 불렀다(昭冉求). 공자가(孔子) 채나라에 가서(如蔡) 섭 땅에 이르렀다(及葉). 초나라 소왕이(楚昭王), 장차(將) 서사지로(以書社地), 공자를 봉하려 했다(封孔子). 영윤 자서가(令尹子西) 찬성하지 않자(不可), 이에 그만두었다(乃止). 또(又) 위나라에 돌아왔는데(反乎衛), 이때(時) 영공은 이미 죽었다(靈公已卒). 위군 첩이(衛君輒), 공자를 얻어(得孔子) 정치를 하고자 했는데(爲政, 而) 염구가(冉求) 계씨의 장수가 되어(爲季氏將), 제나라와의 전쟁에서(與齊戰) 공을 세우자(有功), 강자가(康子) 이에(乃) 공자를 불렀고(召孔子, 而)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다(孔子歸魯). 실로( 實) 애공 11년(哀公之十一年) 정사년(기원전 484년)이고(丁巳, 而) 공자 나이(孔子年) 68세였다(六十八矣).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敍書傳禮記, 刪詩正樂, 序易彖繫象說卦文言.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 七十二人.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孔子作春秋. 明年辛酉, 子路死於衛, 十六年壬戌四月己丑, 孔子卒, 年七十三.

그러나(然) 노나라가(魯) 끝내(終)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고(不能用孔子), 공자도 또한(孔子亦)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不求仕). 이에(乃) 서전과 예기를 서술하고(敍書傳禮記), 시를 산정하고(刪詩) 악을 바로잡고(正樂), 차례로(序) 역의(易) 단전, 계사전, 상전, 설괘전, 문언전을 지었다(彖繫象說卦文言). 제자가(弟子) 대략(蓋) 3천 명이고(三千焉), 몸소(身) 육예에 달통한 사람이(通六藝者), 72명이었다(七十二人). 40년 경신년(기원전 481)에(十四年庚申), 노나라가(魯) 서쪽에서(西) 사냥하다가(狩) 기린을 잡으니(獲麟), 공자가(孔子) 춘추를 지었다(作春秋). 다음 해(明年) 신유년에(辛酉), 자로가(子路) 위나라에서 죽었다(死於衛), 16년(十六年) 임술년(기원전 479) 4월 기축일에(壬戌四月己丑), 공자가 죽으니(孔子卒), 나이(年) 73세였다(七十三).

 

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廬於塚上, 凡六年. 孔子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노성 북쪽(魯城北) 사수가에 장사 지내고(泗上), 제자가(弟子) 모두(皆) 심상 3년을 지내고(服心喪三年而) 떠났는데(去), 오직(惟) 자공이(子貢)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廬於塚上), 모두 6년을 보냈다(凡六年). 공자가(孔子) 리를 낳았는데(生鯉), 자는 백어이고(字伯魚), 먼저 죽었다(先卒). 백어가 급을 낳았으니(伯魚生伋), 자가 자사이고(字子思), 중용을 지었다(作中庸).”라고 했다.

 

何氏曰: “魯論語, 二十篇. 齊論語, 別有問王知道, 凡二十二篇. 其二十篇中章句, 頗多於魯論. 古論, 出孔氏壁中, 分堯曰下章子張問, 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하씨가 말하길(何氏曰): “노논어는(魯論語), 20편이다(二十篇). 제논어는(齊論語), 달리(別) 문왕과 지도 편이 있어서(有問王知道), 모두(凡) 22편이다(二十二篇). 그(其) 20편 중에도(二十篇中) 장구가(章句), 노논어보다(於魯論) 자못 많다(頗多). 고논어는(古論), 공씨의 벽에서 나왔는데(出孔氏壁中), 요왈편 아랫장의(堯曰下章) 자장문을 나누어(子張問), 1편을 삼으니(以爲一篇), 두 개의 자장이 있고(有兩子張), 모두 21편이다(凡二十一篇). 편차가(篇次) 제논어, 노논어와 더불어(與齊魯論) 같지 않다(同).”라고 했다.

 

程子曰: “論語之書, 成於有子曾子之門人, 故其書獨二子以子稱.”

정자가 말하길(程子曰): “논어란 책은(論語之書), 유자와 증자의 문인에 의해(於有子曾子之門人) 만들어졌고(成), 그러므로(故) 그 책에서(其書) 오직(獨) 두 사람을(二子) 자로 칭한다(以子稱).”라고 했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가 말하길(程子曰): “논어를 읽을 때(讀論語), 읽기를 마치고(讀了) 전혀 아무 일 없는(全然無事) 사람이 있고(者); 읽기를 마친 뒤에(讀了後), 그중 한 두 구절을 얻어(其中得一兩句)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喜者); 읽기를 마친 뒤에(讀了後), 알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知好之者), 읽기를 마친 뒤에(讀了後) 바로(直) 손발이 춤추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라고 했다.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 是此等人. 讀了後, 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정자가 말하길(程子曰): “지금 사람들이(今人) 독서를 잘하지 못한다(不會讀書). 만약(如) 논어를 읽었는데(讀論語), 읽지 않았을 때(未讀時), 이런 사람이었는데(是此等人), 읽고 나서도(讀了後), 또 다만(又只) 이런 사람이라면(是此等人), 바로(便) 이것은(是) 전혀 읽지 않은 것이다(不曾讀).”라고 했다.

 

程子曰: “頤自十七八, 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정자가 말하길(程子曰): “내가(頤) 17~8살부터(自十七八), 논어를 읽고(讀論語), 당시에(當時) 이미(已) 글의 뜻을 깨우쳤다(曉文義). 읽은 것이(讀之) 더욱 오래되어니(愈久), 다만(但) 의미를 깨닫는 것이(覺意味) 더욱 깊어졌다(深長).”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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